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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방랑 여행기/피지 - 남태평양 남회귀선 너머의 섬나라

남태평양 [피지 FIJI]

by 생기방랑 202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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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사모아를 떠나 피지(FIJI)로 향했습니다.

아메리칸 사모아로 입국할 때와 마찬가지로 독립국 사모아의 두 공항을 거쳐 피지 난디공항으로 가는 에어퍼시픽을 탔습니다.

요즘 비행기를 타는 제 습관과는 달리, 당시에는 창가에 줄곧 앉아 갔었습니다. 많은 해외여행을 함께 다닌 선배님이 복도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선배님과 여행을 다닐 일이 없고 혼자 여행을 가는 경우가 훨씬 많아 창밖 풍경을 포기하고 복도 쪽에 앉아가는 편리함을 좇습니다. 

비행기에서 남태평양을 내려다보면 예쁘고 흥미로운 섬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애니메이션 모아나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섬들이 곳곳에 박혀있죠. 

 

운 좋게 찾아낸 환초입니다. 도우넛섬이라고 쉽게 부르는 산호섬이 보입니다.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이런 진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을 텐데, 용왕님이 도우신 모양입니다. 저 섬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겠죠? 가까운 아래쪽에 공항으로 보이는 인공적인 구조물이 보이니까요.

 

때는 2003년, 휴대폰에 카메라가 달려있지도 않았고 디지털 카메라도 그리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비행기 기내식을 먹기 전 사진으로 담는 사람도 없었을 때라, 사모아에서 피지까지 오며 뭘 먹었는지는 기록도 기억도 남아있지 않네요.

 

그냥 비행기에서 내린 후 뒤돌아서 타고왔던 저 비행기를 촬영한 게 남아있는 비행기록의 전부입니다.

 

피지 난디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피지의 수도이자 어업 중심지인 수바(SUVA)로 향했습니다. 난디(NADI)에서 수바까지 굉장히 먼 거리였고 왕복 2차선의 외길에 가까운 도로 이름은 퀸즈로드 Queen's Road 였습니다. 우리나라와 운전석이 반대방향에 있었는데, 동행한 선배님이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탓에 오른쪽 운전석 운전이 가능했었죠. 

낯선 곳, 힘들 것 같은 일을 하러 갈 때 운명이 기대려하는 심리가 자꾸 살아납니다. 피지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도넛 섬을 만난 행운이 퀸즈로드에서 만난 쌍무지개로 이어진다고 믿게 됩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수바까지 가야 하지만 중간에 차를 세워 무지개를 사진에 담는 사치를 누립니다. 

지나치는 버스의 모양새도 이국적으로 느껴집니다. 같은 남태평양의 섬나라이지만 하와이나 사모아의 사람들은 폴리네시안이라 덩치가 큽니다. 피지 사람들은 멜라네시안이라 머리는 곱슬머리이고 피부색도 좀 다르고 몸집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수바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난디는 우리나라에서도 직항이 있고 신혼여행을 오는 분들도 종종 있는 관광지이지만 수바는 달랐습니다. 피지 사람들이 생활에 열중하는 - 인터내셔널 시티가 아닌 도메스틱 시티에 가까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조언과 경고를 해주신 것이 수바의 수산시장을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매치기도 많고 강도도 많으니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이었죠. 불과 몇십미터 안 되는 이 수산시장 거리를 걸어가다 돈을 빼앗기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 농산물 시장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코코넛은 알겠는데 처음 보는 작물들이 많았고 농작물보다 더 신기한 건 처음 보는 멜라네시안 계통의 현지 주민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왕래가 많지 않던 시절이니, 동양인 무리와 마주친 피지 사람들도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았죠.

물론 당시에도 피지로의 은퇴이민이 잠깐 유행을 타고 있었습니다. 은퇴와 함께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물가도 싸고 날씨도 좋은 피지로 이민을 많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수영장이 딸린 집을 샀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수영장이 딸린 집만큼 관리하기 힘든 게 없다고 합니다. 수영장에 물을 받아놓으면 모기가 몰려들기 때문에 관리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피지의 현지 환경을 모른 채 넘어와 이래저래 고생만 하고 돈만 쓰다가 은퇴이민에 실패하고 되돌아가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에 중국사람들의 이민도 많았다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산 속 농장으로 들어가 몇 년씩 터전을 일구고 자리를 잡은 후 도시로 나오는 계획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피지에 안정적으로 정착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03년에 들은 이야기이니 17년이 지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일 수 있겠죠. 

  

피지도 영국의 지배를 받았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피지를 점령한 후, 식민지 건설을 위해 피지 사람들을 동원했는데 무더운 섬나라 사람들의 특성상, 행동이 빠르지 않고 상대적으로 근면성도 떨어졌죠. 참다못한 영국 지배세력들은 게으른 피지 사람들을 대신해 식민지를 건설할 사람들도 인도 사람들을 선택해 집단 이주를 시켰습니다.

 

 

피지 사람들에 비해 부지런했던 인도 사람들은 식민지 건설에 큰 역할을 했고 낯선 섬나라 피지에 정착해서 거대한 사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피지 국민은 피지 원주민 절반, 인도 사람 절반이라 할 수 있죠.

 

 

물론 인구 구성은 인도 사람들이 훨씬 적을 수 있지만 피지의 경제력을 인도 출신들이 거머쥐면서 피지 사람들과의 갈등도 커졌습니다.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서로 결혼을 하는 경우도 절대 없고 보이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반목이 크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일이 없는 - 낙원에 가까운 남태평양 섬나라여서인지 피지 사람들도 낙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피지의 검찰총장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몇 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었는데, 두꺼운 카펫이 깔린 집무실을 여비서가 맨발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예쁜 샌들이 있었지만 책상 밑에 고이 모셔두고 맨발로 편하게 일을 하고 있었죠.

 

나중에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더 높은 사람을 찾아 들어갈 때도 역시 맨발이어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피지도 섬나라이다 보니 바다를 통한 교역과 수산업이 경제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항구는 어선과 상선으로 늘 분주했고 대만과 중국의 원양어선들이 많았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선장, 기관장, 항해사, 기관사, 갑판장 등 사관급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타고 실제 일을 하는 갑판원들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하죠.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낮기 때문이었는지 2003년 당시에는 아메리칸 사모아에는 대만 어선들이 가득했고, 피지의 수바항에도 중국과 대만 어선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지나간 사진을 다시 보니, 중국 어선 뒤편으로 보이는 하얀 배는 홍콩의 스타페리를 닮았네요. 영국의 영향을 받은 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자로 배 이름이 적힌 이 어선은 중국 푸조우가 선적지인 모양입니다. FU YUAN YU 로 검색을 하면 중국 푸조우로 등록지가 나오네요. 선체 페인트가 다 벗겨졌다고 해서 곧 침몰할 똥배나 이런 건 아닙니다. 조업과 항해를 반복하다 보면 선체 페인트가 벗겨지게 되고, 일정 기간을 주기로 다시 페인트를 칠하고 보수를 하게 되죠. 

 

1970년대에 진수된 어선들이 지금도 망망대해에서 고기를 잡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배는 수십 년을 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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