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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방랑 여행기/아이슬란드 - 불과 얼음의 땅

오래된 여행 -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 #3 (2009) 솔트피시 박물관 Saltfish Museum

by 생기방랑 202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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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남서쪽 항구도시 그린다비크에는 아이슬란드 이주민의 역사와 함께 한 염장대구 Saltfish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 솔트피시 뮤지엄 Saltfish Museum이 있습니다.

과거 사용했던 다양한 기구들이 실물 크기의 마네킹과 함께 디오라마 구성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여인의 옷차림과 손에 든 대구, 뒤로 보이는 보트를 통해 당시의 삶과 대구를 잡고 가공하는 작업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와 돛으로 움직이던 작은 보트들은 서기 800~900년대 시작된 아이슬란드 이주의 역사와 함께했고 오랜 세월동안 아이슬란드 대구잡이의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소형 어선도 배의 크기가 점점 커져갔고 낚싯바늘을 물 밑으로 내릴 수 있는 길이도 점점 길어져 어획량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란다비크 연안에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대형 어선이 접안할 수 있는 항구가 건설된 이후, 무동력 어선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1800년대 말 3,000척이 넘었던 것이 1930년대에는 100여 척으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농업와 어업을 따로 분리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름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배를 타고 나가 대구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대구잡이 산업의 호황은 아이슬란드인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내륙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바닷가로 영구 이주하면서 해안가를 중심으로 토착화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염장대구, 즉 솔트피시 Saltfish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대구의 껍질과 뼈를 제거해 포를 뜬 다음, 대구살을 세척하고 소금을 뿌려 겹겹이 쌓습니다.

며칠 후 쌓아두었던 대구 더미를 허문 후 소금을 더 뿌리고 다시 쌓습니다. 대구가 소금에 충분히 절여지게 되며 바닷물에 씻은 후 육상에서 건조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후 마른 대구를 천으로 감싼 후 무거운 돌로 눌러 압력을 가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염장 대구가 완전히 마르게 되면 수출 선적이 되기 전까지 실내에 보관하게 됩니다. 대구 수출 초창기에는 마른 대구를 아무런 포장 없이 내보냈지만, 대형 증기선이 오가며 많은 물품들이 함께 배에 실리게 된 후에는 캔버스 천으로 마른 대구를 포장하는 일이 보편화되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아이슬란드에서는 염장대구를 캔버스 천으로 포장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한 자갈을 구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대구를 줄에 매달아 공중에서 말리기도 했습니다. 

 

작은 보트형 어선들은 점차 갑판과 어창이 있는 대형어선으로 대체되고 항해술까지 발달하면서 더욱 먼 바다로 나가 대구를 잡는 방식이 대중화되어갔습니다. 

 

배 안에는 냉장시설을 넣어 미끼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되었고, 대구를 거래하는 상인들이 어획에 투자하면서 대구잡이 산업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영국으로부터 증기기관을 탑재한 트롤어선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250톤짜리 아이슬란드의 첫 트롤어선이 도입된 이후 1920년에는 28척으로, 1930년에는 41척으로 늘어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트롤어선들이 들어오며 아이슬란드의 어업은 혁신적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아이슬란드의 대구잡이와 염장대구 솔트피시  Saltfish는 스페인 등 유럽으로 팔려나가 아이슬랜드의 경제기반을 구축하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어업 중심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항구 주변에 사계절 내내 거주하는 마을들이 늘어나며 아이슬란드 사회를 구성하는 초석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후 아이슬란드의 어업은 보다 현대적인 산업과 금융 등에 기간산업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지만 청정해역에서 어획하는 아이슬란드 대구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인기 식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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